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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근대 광고로 보는 여성 장신구(2)
작성자 s****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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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68



미국잡지-명성황후기사-1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의 시기는 서양식 장신구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신문광고가 시각자료 없이 문자로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디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실제로 사용되었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들은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은 바로 명성황후의 장신구에 대한 것이다. 시카고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국으로부터 파견된 릴리아스 S. 호턴(L.S. Horton)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어의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의 견문을 토대로 글들을 남겼다. 명성황후는 1889년 릴리아스 호턴이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결혼하자 금팔찌 한 쌍과 진주 반지를 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릴리아스는 명성황후가 장신구를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목걸이나 브로치, 팔찌 등을 한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반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황후가 유럽의 제품을 한두 개 이상 낀 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도 다이아몬드가 크거나 많이 박히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멋진 시계를 몇 개 가지고 있었으나 결코 차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미국 잡지인 <Demore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에서는 <그림>처럼 명성황후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도 명성황후가 보석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녀의 손은 길고 가늘어 모양이 예쁜데 다이아몬드로 빛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끼는 반지는 묵직한 금가락지로 항상 손가락 하나에 쌍으로 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일국의 황후로써 외국 사절이나 기타 여러 통로로 서양 장신구들을 상당히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보다는 금으로 된 쌍가락지를 애용했다는 사실은 조국을 향한 명성황후의 신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서양식 생활풍조는 지방의 고위 관료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여행가인 비숍(I.B. Bishop) 여사는 경기도에 있는 한 양반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시계가 각 방마다 걸려 있고 응접실에는 외제 탁자와 벨벳 의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인은 18세의 청년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외제 담배를 피우며 부와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주 어려 보이는 여주인은 인디언 장신구(Indian jewelry)를 걸치고 있었다. 비숍은 “파이프, 반지, 안경, 타월, 향수나 테이블 의자 등 대개 외국의 사치품이 서울에 수입되는 것이 근년에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그 주요한 고객은 양반이다”라며 이와 같은 조선 양반의 과도한 사치 성향을 국가 쇠망의 원인으로 꼬집기도 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외국 문물과 열강들의 야욕 앞에서 어떤 이는 가장 작은 장신구로 조국에 대한 신념을 드러냈지만 대다수는 과시와 탐욕의 수단으로 장신구를 선택하였고 이는 한일합방 후 장신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었다. 다음호에 이어지는 글에서는 한일합방 후의 장신구의 변화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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