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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의 얼을 찾아서 '귀고리’
작성자 s****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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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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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0



 

 

많은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귀걸이’와 ‘귀고리’ 중 올바른 표현은 과연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맞는 표현이다.

 

원래는 여성이 장식으로 귀에 다는 것은 ‘귀고리’라 불렀고, 귀가 시리지 않도록 귀에 거는 것을 ‘귀걸이’라 불렀다. 그러나 요즘은 ‘귀고리’ 대신 ‘귀걸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이를 비표준어로 인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귀고리’의 의미인 ‘귀걸이’를 인정해 표준국어대사전에 복수표준어로 등재됐다.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서 귀에 고리를 단다는 것은 귀를 뚫어서 고리를 끼운다는 의미였는데, 이는 장식용이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가 강했다. 본래 고대사회에서는 천재지변과 각종 재난을 막기 위한 주술로서 다양한 통과의례나 신체변형 등이 자행되었다. 이후 원시사회를 지나 삼국시대에 들면서 귀고리는 차차 권력과 권위를 대변하는 장신구가 됐다.

 

우리나라의 귀고리의 양식은 낙랑(樂浪: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의 옛 지명)에서 연유하여 고구려에 들어와 한국화 되고, 신라에서 발전, 완성됐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여러 점의 귀고리 중 특히 경주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금제태환귀고리(金製太環耳飾:국보90호)’는 기묘한 누금기술과 세련된 귀고리 모양으로 장식됐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귀고리는 종래 왕실의 권위를 알리는 차원에서 벗어나 점차 일반 사대부 자제들, 특히 남성들의 사치와 과시수단으로 전환됐다. 조선초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 귀족자제들의 귀고리 문화는 상당히 일반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언뜻 ‘머리털 하나도 훼손하면 안된다’는 성리학 사회에서 ‘남자가 웬 귀고리이냐’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조선 초기 사대부 자제들은 귀고리를 통하여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다가 세종은 이상적 유교사회로서의 국가적 기강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사대부 자제의 금귀고리 사용만을 용인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년(1418) 항목에는 ‘금쪾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금후 진상용쪾궁내용 술잔 및 사신접대용그릇, 관대쪾명부(命婦)의 뒤꽂이,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일체 사용을 금한다’는 조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선조는 선조 5년 9월 비망기를 통하여 ‘신체발부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이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당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며 귀고리 착용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귀고리의 착용은 거의 사라졌고, 오늘날처럼 귀고리가 다시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전해진다.

 

첨부파일 3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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